[2001년] 초례청에 불 밝혀 놓듯, 뜬 눈으로 첫날밤을 보내 [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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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용학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6,783회 작성일 22-06-09 21:25본문
네팔의 민속주 "창"은 막걸리와 비슷해
3월 24일 ('2001):
카투만두에 도착한 첫날밤. 신혼초야처럼 마음이 설레인다. 여장을 풀어 놓고 잠시 쉬고 있으니,산 후배 이석우씨 부부가 네팔 전통주인 '창’(chang) 과 ‘락시(lassi)’를 선보인다.
‘창’은 히말라야 산간에서 유래된 민속주로 약간 탁하면서 맛이 부드러웠다. 보리와 수수 그리고 쌀로 빚은 술인데 한국 의 막걸리와 흡사했다. 또한 '락시’는 수수나 기장을 발효해서 만든 술인데 색깔이 투명한 것이 맛이 약한 정종맛과 홉사 했다.
입맛에 맞는 술은 ‘락시’였다. 꿈에 그리던 네팔에 첫날 도착해 한껏 흥분된 마음이 술잔속에 서서히 녹아드는 것만 같다. 몇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에 벌써 얼큰하게 흥겨운 기운이 뱃속에서 피어 오른다. 산 좋아 하는 사람은 대부분 술을 좋아하고, 술 좋아 하는 사람들은 거의 사람을 좋아하기 마련이듯,산을 찾는 사람들은 소박한 편이다. 그리고, 우정을 금싸리기보다 더욱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 산에서 위기에 빠졌을 때 살아 날수 있는 것은 금싸리기가 아니라 산 친구간의 끈끈한 우정이리라.
세계의 오지 카투만두에 와서 수십년 지기로 알고 지내던 산 후배를 만나 이렇듯 멋지게 대접 받으니 황제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산을 찾은 때, 행복은 이렇게 소박하게 다가온다. 이처럼 소중한 행복감을 혼자 맛보려니 벌써부터 시드니에 혼자 남겨둔 집사람이 생각이 난다. 집사람은 히말라야에 대한 나의 꿈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악우들이 원정대를 이끌고 히말라야로 떠날 준비를 하면, 힘닿는데로 후원을 해줄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이를 결코 아까워하지 않은 집사람이 아닌가.
몇차례 원정대에 합류할 기회가 있었건만, 사람의 일이 그리 생각대로만 움직여 주지는 않았다.
이제 50대 중반에 혼자 뒤늦게 찾아온 히말라야에서 자아에 대한 성찰이 생겨나는 것을 보니 예전에 사람들이 도를 닦기 위해 왜 산으로 들어갔는지 알만하다. '산에 가서 도나 닦고, 철이 들어 내려오라”던 집사람 의 작별인사를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피어 오른다.
더 이상 미뤘다가는 평생의 한으로 남을 일이란 것을 집사람이 잘 알기에 그도 마지못해 나의 산행을 허락했으리라. 집사람에게 카투만두로 와서 살자면 어떨까하고 생각 해본다. 시드니에 있는 작은집과 가진것을 처분하면 히말라야에서 산장 하나를 장만할 돈은 될 것 같은데.
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고 그들이 전해 주는 세상이야기로 밤을 지새우 고… 이러한 삶을 위해 내 자신이 과연 모든 것을 포기할수 있을까? 쉬운일이 아니다. 산이 좋아서 산에서 살겠다고 네팔까지 건너온 이석우씨 부부를 보니 이들의 용기와 개척적인 모습에 감탄이 솟구쳐 오 른다.
많은 한국인들이 새로운 세계 를 찾아 이민행렬을 떠나면서 지구상의 마지막 오지까지 파고 든다는 사실은 대단한 일이었다. 비록 개인적인 가치와 선호에 따라 다르겠지만 굳이 미국, 캐나다,호주, 뉴질랜드 등 이른바 선진국에만 연연한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하긴, 내 자신도 호주에 이민와 한국에서는 꿈도 꾸지 못하는 ‘때묻지 않은 자연과 벗할 수 있는 삶’을 살면서, 누구를 보고 세계의 오지를 향해 떠나 가라고 부추길수는 없지만 오지 속에서 살아가는 한국인의 모습은 대단히 아름다워 보인다.
카투만두의 밤은 깊어만 가고 회포를 푸는 술잔 역시 셀수없이 거듭된다.
술에 취했지만, 정신은 더없이 맑아 온다. 내일을 위해 잠을 자야 되건만 창밖은 달빛으로 초례청에 켜놓은 불처럼 환하 다. 첫날밤이라 그런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창 넘어 보이는 달빛 머금은 설산을 보며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다.
그 영험스런 설산의 자태에 넋을 잃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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