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강가푸르나" 호수에서의 망중한 [2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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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용학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6,026회 작성일 22-06-09 22:57본문
'내게 있어 히알라야야는 무슨 의미인가…’ 산행 의미 정리
4월4일(트래킹 일곱 째날》
마낭의 하루가 밝았다. 침낭에 누워 창밖으로 바라보는 ‘안 나푸르나’ 3봉과 ‘강가푸르나’ 봉이 아침 햇살에 눈부시다. 침낭 속에서 포터인 ‘빠듬’이 가지고 온 모닝티를 마시며 한껏 여유를 부려본다.
고소적응을 위해 이곳에서 하루를 더 보내기로 했다. 느굿하게 아침을 먹고 ‘강가푸르나’ 호수로 소풍을 가기로 했다. 호텔에서 30분 거리에 이 호수는 ‘강가푸르나’ 빙벽에서 훌러내린물이 고여 호수를 이룬곳으로 ‘안나푸르나’ 3봉과 ‘강가푸르나’ 정상을 바로 앞에 두고 있다. 그림엽서에서 본 그대로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이다. 고요하고 잔잔한물이 너무 맑고 푸르기만 했다. 호숫가 벤치에 앉아 상념에 젖어본다. ‘나는 왜 이곳에 왔을까.’ ‘무엇 때문에 이 먼곳까지 혼자 와있는걸까. 시드니를 떠나며 히말라야에 빨리 가야한다는 조급증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고교산악부 시절, 북한산 백운대에 처음 올라본 이후 호주로 이민을 떠나올때까지 한시도 잊지 않았던 산에대한 열정이 10여년의 이민생활에서 메말라 버린것은 아닌지. 그래서 더 잊기전에 히말라야를 선택 해야만했고 산은 이제까지의 내 삶의 대부분이었다.
내가 시드니 이민생활에서 ‘어느날 문득’ 히말라야를 생각해내고 생각과 동시에 옛날의 그배낭을 꺼내 먼지를 털어내고,짐을 꾸리고 훌쩍 카투만두로 떠난것은 내 생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던 산을 통해 새로운 나를 발견하려는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정말 오랜만에 평화를 느끼면서 시드니의 아내에게 엽서를 썼다. 안부와 함께 이번 산행은 참으로 소중했다는 고백도 함께 적었다.
점심은 ‘푸림’이 라면을 끓여 주었다. 호숫가에 앉아 라면을 먹는 맛이란… 숙소로 돌아오는데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황량한 벌판위로 쌀쌀한 바람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자 문득 호숫가에서의 고요속에서.느꼈던 평화가 깨지는 느낌이었다.
이런 산속에서는 해가 지는 시간이 가장 싫다. 텅 비어있는 호텔은 의지할 데 없는 분위기 때문에 체감추위는 한결 더하다. 락씨를 마시고 일찍 잠이나 잘까.
역시 셀파인 장부씨는 가이드로서의 노련미뿐 아니라 눈치 하나도 끝내준다. 내가 그의 이름 인 ‘장부’라고 부르지 않고 꼭 ‘장부씨’라고 하는것은 이런 이유도 있다. 호텔 침낭속에 몸을 묻고 책을 읽고 있는 내게 “호텔 바로 앞에 주막이 있는 데, 화덕이 좋으니 락씨나 한 잔 하자”고 한다. 해발 3000m 이상에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단지 결심으로 끝난다.
주막은 두 자매가 운영하는데,언니는 ‘조마’(28)이고 동생은 ‘체림’(20)이라고 했다. 체림은 마낭고교의 국어(네팔어)교사로 매니큐어까지 바르는 등 멋을 한껏 멋을 부리고 있었다. 실내도 여느 주막과는 다르게 깨끗하게 단장을 해 놓아 마음에 들었다. 락씨맛도 일품이었다.
우리가 안주로 가지고 온 파인애플 캔을 나누어 주었더니 자기도 ‘께라우’(콩을 기름에 볶은 간식거리)를 만들어 주는
데, 아주 고소했다. 이 집도 동네 청년들이 와 ‘창’과 락씨를 즐겨 마신다.
‘조마’와 ‘체림’은 이야기도 재미있게 하고 붙임성도 있어 시간 가는줄 모르는 가운데 마낭의 밤은 깊어만 간다.
‘한잔’ 걸친 마음 탓일까. 가까운 ‘곰파’(사원)에서 밤예불을 드리는 ‘겔링’(피리) 소리가 처량하게 들린다. 이 겔링소리는 스코틀랜드의 백파이프 소리 와 유사한데,
곡조는 한없이 느리고 애잔해 나그네의 마음을 더욱 쓸쓸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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